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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건축 이야기] 공간사옥(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건축적 분석 : 전벽돌 미로에 각인된 시간의 지층과 공간의 시퀀스

공간사옥(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외관 사진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건축사 아빠 [대한건아] 입니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창덕궁의 고색창연한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검은 벽돌 건축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외벽을 타고 오르는 붉고 푸른 담쟁이덩굴과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유리창이 인상적인 이곳은, 한국 현대건축의 독보적 성취로 꼽히는 구 공간사옥(현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국가등록문화유산 제586호)입니다.

 

 최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이곳의 독특한 포토 스팟이나 전시된 현대미술 작품들이 조명받고 있지만, 이 장소의 진정한 가치는 도면으로 온전히 번역될 수 없는 '공간(Space)' 그 자체의 물리적 경험에 있습니다.

 한국 현대건축 1세대 거장 김수근이 자신의 설계사무소로 빚어낸 이 건축물은, 서구 모더니즘의 보편성에 한국적 공간의 특수성을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에 대한 가장 치열한 해답이었습니다.

 건축의 구축적 논리와 공간의 시퀀스를 중심으로 이 건축물이 지닌 가치를 해부해 보겠습니다.


1. 공간의 구축적 해부 : 스킵 플로어와 수축·팽창의 미학

 방문객들이 공간사옥 내부에서 가장 먼저 직면하는 감각은 '방향의 상실'과 '끊임없는 전개'입니다.

 이는 건축가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스킵 플로어(Skip Floor) 구조에 기인합니다.

 

 공간사옥은 일반적인 건축물처럼 1층, 2층으로 슬래브(바닥)가 명확히 단절되지 않습니다.

 북촌 대지의 완만한 경사를 건축물 내부로 끌어들여, 반 층씩 어긋나며 상승하고 하강하는 구조를 취했습니다.

 그 결과, 서류상으로는 지하 1층에서 지상 5층의 건물이지만, 실제 내부를 걸으면 15개 이상의 각기 다른 바닥 레벨(Level)을 연속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입체적 동선은 단순한 기교가 아닙니다.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공간은 극한으로 수축(Compression)되지만, 계단의 끝에서 갑자기 빛이 쏟아지는 넓은 업무 공간이나 응접실을 만나며 공간은 극적으로 팽창(Expansion)합니다.

 시선은 단절되지 않고 엇갈린 반 층 위아래로 끊임없이 관통하며 교차합니다.

 이는 한옥의 문을 열었을 때 마당을 거쳐 대청마루, 건넛방으로 이어지는 한국 전통 건축의 연속적 공간 경험을 수직의 현대적 구조로 재해석한 고도의 설계 논리입니다.

 

2. 신체적 척도(Human Scale) : 압도하지 않고 품어내는 공간

공간사옥(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내부 사진

 

 현대 건축의 효율성과 규격화된 기준에 익숙한 이들에게 공간사옥의 내부는 다소 낯설거나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성인 두 명이 교행하기 벅찬 좁은 계단, 무심코 걷다 보면 고개를 숙여야 하는 낮은 천장과 문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김수근 건축가가 주창한 ‘모태 공간(Womb Space)’ 철학이 반영된 철저한 휴먼 스케일(Human Scale, 인간의 신체적 척도)입니다.

 그는 거대한 매스(Mass)로 인간을 압도하는 서구 권위주의적 모더니즘 건축을 경계했습니다.

 대신 어머니의 태내처럼 인간을 아늑하게 품어주는 공간, 즉 신체의 움직임과 시선의 높이에 반응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최근 소셜 미디어에서 "건물 안에서 북촌의 골목길을 걷는 듯하다"는 방문객들의 감상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건축가는 외부의 수평적 골목길을 건물 내부로 꺾어 접어 수직의 동선으로 만들었습니다. 손끝에 닿는 거친 전벽돌의 질감,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나무 바닥의 감각은 관람객에게 건축물을 '보는 대상'이 아닌 '촉각적으로 교감하는 대상'으로 전환시킵니다.

 

3. 재료와 시간성 : 완성되지 않고 나이 들어가는 유기체

공간사옥(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외장재(전벽돌) 참고 사진

 

 외장재로 사용된 검은빛의 전벽돌(흑벽돌)은 공간사옥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바로 옆 창덕궁의 기와, 그리고 주변 한옥들의 스케일과 물성을 거스르지 않고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건축에서 벽돌이라는 재료가 지니는 가장 큰 미덕은 '시간성(Patina)'입니다.

 1971년 착공되어 1977년 증축을 완료한 이 건물은 완공된 순간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비바람에 풍화되며 질감이 깊어졌고, 건축가가 의도한 대로 담쟁이덩굴이 벽돌의 틈새를 유기체처럼 덮어 나갔습니다.

 공간사옥은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개입을 수용함으로써 스스로 완성되어 가는 건축의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4. 시간의 삼중주와 '화이트 큐브'를 거부한 미술관

 오늘날 원서동 219번지 대지 위에는 하나의 건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수근의 흑벽돌 구사옥(1970년대) 옆에는 그의 제자 장세양 건축가가 스승의 건물을 가리지 않기 위해 설계한 투명한 유리 신사옥(1997년)이 서 있고, 그 사이에는 이상림 건축가가 증·개축한 한옥(2002년)이 절묘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과거(벽돌), 현대(유리), 그리고 전통(한옥)이 각자의 물성을 유지한 채 서로를 존중하는 이 풍경은 세계 건축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세대교체의 앙상블입니다.

 

 2013년 공간그룹의 부도로 이 위대한 건축물이 경매에 넘어갔을 때, 상업 자본에 의한 훼손을 막아낸 것은 아라리오 그룹이었습니다.

 2014년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로 재탄생한 이곳은 현대 미술관의 전형적인 공식인 '화이트 큐브(하얀 벽의 네모난 전시실)'를 완벽히 거부합니다.

 

 최근 예술계에서 이 공간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건축과 큐레이팅의 완벽한 길항작용'에 있습니다.

 백남준, 바바라 크루거, 마크 퀸 등 세계적 거장들의 현대미술 작품들이 건물 본래의 화장실 욕조 위, 좁은 다락방, 나선형 계단 틈새에 마치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공간의 개성을 그대로 살린 전시 방식은, 건축물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며, 이는 건축물 자체를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마스터피스(Masterpiece)로 격상시켰습니다.


마치며 : 공간을 감각하는 순례의 길

 공간사옥은 도면과 사진이라는 2차원적 매체로는 결코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다차원적인 건축물입니다.

 좁은 창틀 사이로 계절마다 다르게 스며드는 빛의 산란, 층을 오를 때마다 변주되는 공간의 리듬은 직접 발을 딛고 걸어보아야만 온전히 해독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말, 창덕궁 주변을 찾게 된다면 이 검은 벽돌 미로 속으로 들어가 보시기를 권합니다.
 단순히 유명한 미술 작품을 관람하는 행위를 넘어, "건축가가 이 공간을 통해 나에게 어떤 경험을 설계했는가"를 추적하며 걷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관람을 넘어 한국 현대건축의 가장 내밀한 심연을 마주하는 훌륭한 건축적 순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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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laimer : 본 포스팅은 개인적인 견해와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해당 미술관의 공식적인 입장이나 설명과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 방문 전 최신 관람 정보(시간, 휴관일 등)는 공식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