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대한민국 건축사 아빠 [대한건아] 입니다.
서울 용산 한복판, 한강대로에 선 거대한 큐브 형태의 건물은 주변의 스카이라인과는 사뭇 다른 결을 보여줍니다.
화려한 곡선이나 반짝이는 커튼월(유리 외벽) 대신, 은은한 무광의 알루미늄 루버가 드리운 조용하면서도 단단한 존재감.
2017년 완공된 아모레퍼시픽 본사 신사옥입니다.
건축을 설계하고 공간의 맥락을 고민하는 전문가의 시선에서, 이 건물은 단순한 대기업 사옥을 넘어 한국 현대 오피스 건축의 패러다임을 바꾼 하나의 '사건'입니다.
뻔한 타워형 건물을 올리는 대신 막대한 구조적 투자를 감수하며 자연을 끌어들였고, 사유지인 기업의 로비를 시민들에게 내어준 이 결단은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글에서는 이 건축물의 설계자인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설계 의도와 그 이면에 숨겨진 건축적 결단, 그리고 정교한 디테일들을 깊이 있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1. 건축 개요 & 건축가 소개
- 위치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 100
- 규모 : 지하 7층, 지상 22층 (연면적 약 188,902㎡)
- 완공 : 2017년 (2018년 정식 오픈)
- 건축가 : 데이비드 치퍼필드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2023년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한 영국의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핵심 철학은 '과시하지 않는 절제미와 장소성(Context)의 존중'입니다.
그는 건물이 주변 환경을 억누르며 홀로 돋보이는 '빌딩 숲 속 고립된 오브제'가 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아모레퍼시픽 사옥 역시 급변하는 용산의 도시 맥락과 거대한 자연(용산공원) 사이에서, 도시와 자연을 연결하는 유기적인 매개체로 설계되었습니다.
2. 정육면체에 담긴 백자 달항아리의 본질 : '비움'의 결단
많은 매체에서 이 건물의 모티브를 '백자 달항아리'라고 언급합니다.
하지만 외관은 둥근 항아리가 아닌 정육면체(Cube)입니다.
치퍼필드가 차용한 것은 형태 그 자체가 아니라 달항아리의 '본질'이었습니다.
화려한 장식 없이도 주변을 넉넉하게 포용하는 질감, 비례, 그리고 여백의 미학이죠.
그 핵심은 건물의 볼륨을 과감히 파내어 만든 3개의 대형 '루프 가든(Roof Garden)' (5층, 11층, 17층)에 있습니다.
각각 5~6개 층의 높이를 통째로 비워낸 이 거대한 '행잉 가든(Hanging Garden)'은 한옥 중정(마당)과 대청마루가 가지는 비움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입니다.

용적률의 한계를 역이용한 지혜와 막대한 구조적 투자
일각에서는 이 거대한 비움(Void)을 두고 "수백억 원어치의 임대 면적을 포기했다"고 말하지만, 건축 실무의 관점에서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 대지는 용적률이 약 800%대로 제한된 상업지역으로, 애초에 저 거대한 큐브의 속을 꽉 채워 건축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선택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제가 건축가와 기업(건축주)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용적률 제한을 핑계로 경제성이 좋은 평범하고 길쭉한 고층 타워를 올리는 대신, 거대한 정육면체의 볼륨을 설정한 뒤 속을 과감하게 파내는(Void)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이렇게 속을 비워내기 위해서는 비워진 상부의 막대한 하중을 지탱할 고난도의 특수 구조 설계(메가 트러스 등)가 필요하며, 외기에 면하는 표면적이 급증하여 건축비가 천문학적으로 상승합니다.
즉, 엄청난 공사비를 기꺼이 추가 투자하여 '빛과 바람의 길'을 확보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건물 안쪽 깊숙한 곳까지 자연 채광과 환기가 가능해졌고, 직원들은 꽉 막힌 실내가 아닌 '숨통이 트인 큐브' 안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빛과 그림자를 정밀하게 조율하는 파사드 : 알루미늄 루버의 과학
아모레퍼시픽 사옥 밖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외장 요소는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는 수직 선들, 바로 '알루미늄 루버(Louver)'입니다.
이는 SNS에서 가장 사랑받는 포토 스팟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껍데기(치장)가 아닙니다.
환경, 구조, 미학을 동시에 해결하는 고도의 정밀한 건축 장치입니다.
환경적 필터 (일사량 제어와 냉방 부하 감소)
외벽을 둘러싼 총 21,511개, 무게만 약 3,300톤에 달하는 이 거대한 루버 핀들은 위치에 따라 그 형태가 다릅니다.
건물의 동서남북 향에 따른 태양의 일사량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직사광선이 강하게 드는 면은 루버를 촘촘하게, 덜 드는 곳은 넓게 배치했습니다.
루버의 너비 또한 200mm에서 450mm까지 다양합니다.
이는 여름철 뜨거운 직사광선을 차단해 냉방 부하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동시에, 실내로는 눈부심 없는 부드러운 간접광만을 필터링하여 들여보냅니다.
시각적 착시 (무게감의 상쇄)
미학적으로도 이 루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치퍼필드 본인이 "유리 건물에 무게감과 디테일을 부여하기 위한 병풍"이라고 표현했듯, 무광의 알루미늄 핀들은 빛의 각도와 관찰자의 이동에 따라 건물이 마치 얇은 직물 베일에 싸인 듯 가볍고 유려하게 느껴지는 착시를 만들어냅니다.
4. 사유지가 아닌 '도시의 거실'이 된 1층 아트리움
일반적인 대기업 사옥의 1층을 떠올려 보십시오.
엄격한 보안 게이트, 차가운 대리석 로비, 사원증이 없는 외부인은 출입조차 꺼려지는 폐쇄적인 공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아모레퍼시픽 사옥의 1층 아트리움에 들어서는 순간,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공간감을 마주하게 됩니다.
3층 높이까지 시원하게 뚫린 노출 콘크리트 마감의 거대한 보이드(Void) 공간은, 사옥이라기보다는 현대 미술관의 메인 홀이나 대형 공공 도서관에 온 듯한 압도적인 개방감을 선사합니다.
"기업의 공간을 시민과 공유하다"
이는 단순한 건축가의 제안을 넘어, "기업은 지역 사회와 호흡해야 한다"는 창업주 故 서성환 회장 때부터의 철학이 공간으로 구현된 결과입니다.
1층부터 3층까지는 아모레퍼시픽 미술관(APMA), 전시 도록 라이브러리(apLAP), 카페 등 상업 및 문화 시설이 배치되어 시민 누구나 문턱 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습니다.
지하철 신용산역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은, 이 거대한 건축물이 도시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장벽이 아니라 '도시를 연결하는 공공 거실(Public Living Room)'로 기능하도록 만듭니다.
한국 기업 건축 역사상 공공성(Publicness)을 이토록 훌륭하게 실천한 사례는 드뭅니다.
[글을 마치며] 건축이 기업의 철학을 입었을 때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가 추구하는 내면과 외면의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기업 철학을 이상적인 건축 언어로 번역해 낸 걸작입니다.
법적 한계(용적률)와 타협하여 밋밋한 타워를 세우는 대신 막대한 비용을 들여 백자 달항아리의 여백을 창조했고, 폐쇄적인 성벽을 쌓는 대신 시민과 직원이 공유하는 수평적 공간을 열었습니다.
화면 속 사진이나 도면으로는 이 공간이 뿜어내는 층고의 비례감, 노출 콘크리트 사이로 쏟아지는 빛의 깊이, 그리고 거대한 스케일이 주는 고요한 위안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이번 주말, 용산에 들르신다면 이 거대한 '현대판 달항아리'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보시기를 권합니다.
단순한 핫플레이스 방문을 넘어, 공간이 인간과 도시를 어떻게 위로하고 연결하는지 묵직한 영감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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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laimer : 본 포스팅은 개인적인 시각과 해석을 바탕으로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의 건축적 특징과 공간을 분석한 칼럼입니다. 건축물에 대한 설계자 또는 아모레퍼시픽 측의 공식적인 설명 및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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